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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고개를 넘어가는 퇴근 시간. 한 손에 책을 든 사람들이 서점으로 모여든다. 검정 바탕의 표지에는 샛노란 레몬 하나가 불투명한 형체로 그려져 있다. 초여름 밤, 상큼한 이야기를 기대한 이들도 있었을까. 소설가 권여선이 낭독을 시작하자 그러한 기대는 당장에 어긋나버린다. 살해당한 언니의 죽음을 추적하는 화자의 상념이 서점의 공기를 메운다. 긴 테이블에 둘러앉은 독자들은 책 속에 얼굴을 파묻고는 손가락으로 글줄을 따라간다. 독자 하나가 소설가의 목소리를 이어받는다. 서걱서걱 책장이 넘어간다. 혜화동 로터리를 빙빙 도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창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책의 숲, 낭독의 밤이다.